●그리스도인의 자유 ①율법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②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자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자유 ③아디아포라(adiaphora)에 관한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지 않다.
고전 8 & 롬 14 –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하여 양심이 강한 자와 양심이 약한 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비록 우상 제물로 바쳐졌다가 시중에 나온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니어도, 만약 그런 고기를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삼가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고전 10:23).
이웃의 유익을 고려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 행사의 출발점이다.
-성경에서 금하고 있지 않은 모든 허용된 일들에 자유하지만 우리의 기호보다 먼저 이 허용된 일을 하는 것이 형제에게 덕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이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선과 유익을 위해 우리의 행동과 자유를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 하나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롬 12:1-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의 두 축을 중심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아디아포라 -비본질적인 것, 중립적인 것 – 선과 악에 속하지 않는 제3의 것이나 영역
-실제 생활에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금하거나 허용되지 않는 것들과 부분들
예) 담배, 카드 놀이
-M. Luther – 예배 의식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던 의복과 종, 촛불, 성상의 모양과 상징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디아포라라고 보아 금하지 않았다. 17세기 말 – 루터파 내에서 춤, 음악, 그리고 세상적 오락에 관련하여 아디아포라 논쟁이 벌어졌는데 극장가는 것과 댄스 파티에 가는 것을 아디아포라라고 생각한 그룹이 있었던 반면 경건주의자들은 경건 생활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하여 아디아포라가 아니라고 하였다.
-아디아포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것 또는 행위들이 결코 선과 악에 무관한 중립적인 지대에 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 중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 소위 제 3의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 -창조된 것들 중에 그 자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은 없고 (롬 14:14),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말한다. -딤전 4:4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술과 담배의 문제 -술과 담배를 기호품으로 즐기는 것에 관한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회라는 특수한 공동체 속에서 형제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주장: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했고 술 자체를 금한 구절은 없고 담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으니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은 한국 교회의 독특한 역사적/문화적 산물일 뿐 결코 신앙의 본질과 관련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면에서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 주장은 수긍할 부분이 있지만 술과 담배를 금지한 것은 한국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아 왔고 일반적으로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이 신자로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기에, 이런 전통과 문화적 현실에서 신자, 특히 직분자가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이 덕스러운 행동은 아닌 것이 사실이고, 이 행동은 때로는 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술과 담배 문제가 신앙의 핵심과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라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여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어쩌면 술과 담배의 문제는 한국 교회에서 만큼은 아디아포라의 영역을 벗어나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 있다. 이 전통이 좋은 전통으로 교회에 덕을 끼친다면 계속해서 가꾸어가고 이어가야 할 전통일 것이다. -술과 담배를 한다고 해서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거나 교회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지는 않지만 교회 공동체와 형제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하고 절제하면 아름답고 선한 삶이 될 것이다.